청년 교인 이재명의 독립운동
청년 교인 이재명의 독립운동
  • 김종성 기자
  • 승인 2021.09.2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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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기독교 역사분석] 이완용 향해 칼을 빼든 20세 독립운동가

한국 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소극적 자세를 보였다. 이는 일차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의 태도에 기인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서양과 협력하는 일본에 대해 호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했던 그들의 태도는 한국 교인들의 정치의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한국교회 통사시리즈로 펴낸 류대영 한동대 교수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함북 함흥, 경성 등지에서 개신교인들이 부당한 염전세, 연초경작세, 주조세 거부운동을 벌이자, 캐다나 선교사들이 그 배경이 되어주거나 일제의 가혹한 대응을 해외에 알렸다"면서 캐나다 선교사는 미국 선교사와 달리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들의 항일운동을 돕거나 방조하여 일본 당국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고 서술한다.

이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일본의 지배를 긍정한 서양 선교사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항일운동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한국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선교사들이 의병투쟁 등의 반일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표했기 때문이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교인들이 동요하자, 미국 선교사들은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그러나 모든 서양 선교사들이 일제 침략을 묵인한 게 아니듯이, 모든 한국 교인들이 저항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교인들도 당연히 있었다. 친일 매국노 이완용을 응징하고자 칼을 뽑아들고 달려든 이재명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수록된 이재명 사진.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수록된 이재명 사진.

이재명은 김옥균의 갑신정변 3년 뒤인 18871016일 평양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교세가 막강했던 그곳에서 그는 일찌감치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1933년에 독립운동가 조소앙이 펴낸 <유방집(遺芳集)>이라는 독립운동가 열전 속의 이재명전은 이재명이 “13세에 예수교 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는 그 전에 이미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재명과 기독교의 인연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서양 선교사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게까지 됐다고 이재명전은 말한다. 이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미국으로 간 그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일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동해도 아닌 태평양을 건널 생각까지 했던 데는 선교사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열정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1907년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게 됐다. 백척간두의 위기로 내몰린 민족을 먼발치서 관망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잃고 식물 국가가 된 고국을 그는 태평양 건너에서 지켜볼 수 없었다.

그가 미국에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와 관련하여,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共立)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자 그는 자원하였다고 한 뒤 그해 10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이때 나이는 20세였다.

그가 처음에 결의했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었다. 19091월 이토가 순종황제와 함께 평안도를 순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평양역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중지했다. 순종의 신변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뒤 이재명은 이토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북상했지만, 그해 1026일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듣고 내려오게 된다.

그런 다음, 착수한 일이 이완용 처단이다. 벨기에왕 레오폴 2세를 위한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 결심하게 된 일이다. 19091222일 오늘날의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벌어진 이재명 의거에 관해 당시의 정치평론가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때 이르러 완용은 비리시(比利時) 황제가 사망하여 종현교회에 설치한 추도회로 갔다. 재명은 교회당 밖에서 엿보고 있다가, 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나타나자 칼을 휘두르며 인력거 인부 박원문을 찔렀다. 그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재명은 몸을 날려 인력거에 뛰어올랐다. 완용이 급히 피하는 사이에 그의 허리와 등 세 군데를 잇달아 찔렀으나, 순사들이 재명을 찔러 인력거에서 떨어트린 후 완용을 여럿이 들고 갔다.”

이때 이완용은 51세였다. 군밤장수 차림의 22세 청년 이재명이 그를 끝내 쓰러트리지 못한 데는 다소 엉뚱한 요인들이 작용했다. 이완용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의외의 변수로 작용했다. “완용은 머리를 깎은 데다가 양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붙들기가 불편했고, 융전(絨氈, 두꺼운 모직물)으로 두껍게 단장을 하고 있어서 급소를 찌르지 못한 것이라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법정에 선 이재명은 의연했다. 자신은 역적을 처단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밝히는 한편, 공모자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자신과 함께했다고 역설했다. 1910518일 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지자,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며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말로 도리어 일본멸망 선고를 내렸다.

이재명은 국권침탈 다음 달인 1910930일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이완용은 16년 뒤인 1926211일 사망했다. 이재명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민족을 사랑하는 일이 전혀 충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역시 민족을 지키는 일에서 예외가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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