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양용주 목사 목회 인생에 대한 단상
고 양용주 목사 목회 인생에 대한 단상
  • C헤럴드(CHERALD)
  • 승인 2019.11.23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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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양진우 목사(초이화평교회 담임ㆍC헤럴드 편집국장ㆍ한국성경신학연구원 교수)
3대째 목회를 이어가고 있는 양진우 목사
3대째 목회를 이어가고 있는 양진우 목사

대한예수장로회(대신) 교단의 ‘법통’이라고 널리 알려진 부친 고 양용주 목사가 소천한지 15주기가 됐다. 지난 2004년 11월 23일에 “아버님께서 돌아 가셨다”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멍해졌고,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이게 웬일인가?”, “목회 인생에서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셨는데, 분명코 과로하셔서 그랬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삼성병원으로 달려가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천으로 덮은 이동침대에 실려 서울적십자병원 영안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면서 “아버지! 이제야 쉬시는군요”라고 말을 하며 나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장례식 과정을 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복음의 씨를 뿌렸는지 목격하게 됐다.  수백 개의 조화들, 통곡하며 조문하러 끝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동역자들과 양무리들, 그리고 지인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살아 온 열매를 목격했다. 장례 과정에서 아버지의 인생 여정이 아스라이 기억났다.
기억나는 아버지 고 양용주 목사는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리고 대신교단의 위상 강화를 위한 사역, 복음 전파, 청파중앙교회의 양 무리를 친자식처럼 여기면서 목양에 죽도록 최선을 다한 주의 종이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죽도록 주의 일만 하다 소천했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 천국에서 목회 인생에 대하여 여한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생전에, 목회 길을 뒤이어 가던 나를 유독 사랑해 늘 목회적 조언을 해줬다. 아버지는 목회 방법에 대해 “목회를 하다 보면, 모함을 당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변명하지 말고 예수처럼 인내하라”며 “하나님께 최선을 다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최선을 다 하신단다”고 전했다. 또한 “나는 목회 일하다 교회에서 죽을 것”이라며 “죽는 날까지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을 각오란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 말대로 소천 당일에도 최선을 다해 목회 일하는 도중에 교회 사무실에서 소천했다. 주일 일과를 마치고, 다음 날인 월요일에 부교역자들과 직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김장을 돕는다고 중원으로 직접 가서 무와 배추를 함께 싣고 왔다. 저녁에는 타 교회 제직세미나를 인도하러 갔다가 밤 늦게 귀가한 후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인도했고, 오전 교회 직원 조회 겸 예배를 인도한 직후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소천했다. 
충성을 다했던 부교역자들에게 일을 조금 더 맡기고, 그날 쉬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그리움에 젖는다. 죽도록 충성하며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이 주의 일을 하다 소천 했지만, 남겨진 우리들은 너무나 애탄다. 아직도 주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68세에 소천했으니 안타까움이 더 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어릴 적 이야기를 자주 전했다. 아버지는 1938년 11월 20일(음력), 경기도 용인군 양지리에서 출생했다. 평양으로 이주했다가 남북 분단 전후로 월남해 고향에서 기거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 치열하게 총격전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쌍둥이 여동생이 배고프다고 울자 이복순 여사가 양식을 구하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때 아버지는 마당으로 뛰쳐나가 당신의 모친 시신을 안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살벌한 전쟁터를 피해서 종친 집성촌인 충북 청원군 문의면으로 여동생 셋을 수레에 싣고 피난길을 가던 중 쌍둥이 여동생들이 굶고, 병들어 죽었다고 전했다.
초등학교를 여섯 번이나 전학할 정도로 이사를 많이 했고 가난했다. 배재중학교에서 충남 서천군 장항읍 소재 장항중학교로 전학했고, 장항농고에서 학도호국단장을 할 정도로 공부도 잘 했으며, 모범생이었다고 동창들이 증언한다. 당신의 부친 양춘식 목사가 당시 부흥사로 전국을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늘 생활이 어려웠고, 가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양춘식 목사의 명에 따라 전북 옥구군 미면 신흥교회로 부임해 갔다. 그리고 군산 비행장에서 잡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한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게사리와 거사리 사이 외진 마을에서 20명 밖에 되지 않던 교회를 개척 5년 만에 200명 출석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양춘식 목사께서 충남 서천군 장항읍 신창동에서 개척했다가 인천으로 개척하러 올라가면서 물려 준 신창교회로 1967년에 부임해 갔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현재의 총신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서평양노회에 소속했던 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렴풋이 아버지가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 갔다가 내려올 때 장항역에서 아장 아장 걸으며 기다렸던 나를 안아 줬던 품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가 평일에 대한신학교로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 갔다가 내려올 때 장항역에서 장난감 총을 선물로 주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는 1969년 8월 11일에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전거를 끌고 아침에 나가면 하루 종일 전도와 심방하다가 밤늦게 들어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연구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취미도 없었고, 놀러가는 것도 몰랐다. 그곳에서 14년 목회하신 후 헌신의 열매로 서천군 내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짓고,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1980년 6월 19일에 청파중앙교회로 부임해 갔는데, 당시 청파중앙교회는 신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였다. 그래서 대한신학교 교목실장을 지내면서 구약개론, 교회헌법을 가르쳤다. 목회를 하면서 늘 공부를 했던 아버지가 기억난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잠자던 나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면서 흘리던 눈물 방울이 지금도 내 이마에 맺히는 듯하다. 새벽기도회 후 아침 일찍 공부하고, 저녁 늦게 귀가 후 지친 모습으로 서재에서 연구하던 아버지가 기억난다. 바쁜 목회 일정에도 총신대학교 신학연구원 및 목회대학원, 단국대 경영대학원, 경기대 교정교화대학원을 다니셨고,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목회자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 서울신학원을 설립했고, 대신목회대학원을 세워 목회자들의 평생 연장 교육에 힘썼다. 목회와 공부,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늘 열심이었던 것은 교단의 위상 강화와 한국 교회의 연합 운동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제23대와 24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단의 법과 조직 체계 등을 정비해 교단 발전의 기틀을 세웠다. 그리고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한국장로교연합회의 대표회장을 역임했고, 이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공동회장과 법인이사를 역임했다. 
옆에서 본 결과,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였다. 매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삶 뒤에 온 열매들이었다. 큰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했던가? 한국교회의 큰 별이다 보니 가끔 사실과는 전혀 다른 거짓 루머가 떠돌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예수처럼 인내하고 있단다”며 “하나님만 알아 주시면 된단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당회장으로 시무했던 청파중앙교회당 건물이 신학교와 공존하다 보니 법적으로 애매했다. 더군다나 대한신학교 및 대한신학대학의 후신인 안양대학교가 대신교단에서 타 법인으로 넘어가자 서계동 교회당 건물을 다시 찾기 위해서 밤잠도 못 자고 고민했던 모습,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건물을 돌면서 교회당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청파중앙교회당 건물을 되찾기 위한 노력 과정에서 심장병을 얻게 돼 대수술도 했다. 결국 모든 부채도 다 청산해 부채가 전혀 없는 교회로 우뚝 세워 헌당식까지 했었다. 이 과정에서 너무 과로해 결국 일찍 소천한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청렴했다. 내가 2016년 10월 20일부터 이재옥 목사(화평교회 시무)의 3년간 지원으로 개척했을 당시 아버지께서 “나는 돈이 없기에 기도 밖에 아버지로서 해줄 것이 없구나”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당의 땅 주인이 나가라고 할 때, 와서 눈물만 흘리시던 빈털터리 아버지이자 청렴한 중대형교회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 출마 때도 개인 비자금이 전혀 없어서 총회 목회자들의 후원금으로 출마했다.
소천하기 전, 그해 여름에 우리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가자고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이 기억난다. 또한 돌아가시기 사흘 전 토요일에 아버지 교회 성도의 자녀 결혼식에 오라고 재촉해서 갔었는데, 내 얼굴을 보면서 흐뭇해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가실 줄 알고 목회자 아들 얼굴 한 번 보려고 했는가보다.

그리고 추석 때 영상전화기를 사주면서 매일 얼굴 보고 살자고 했던 말 등을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마 마지막으로 자식을 실컷 사랑하고, 실컷 보고 돌아가시려는 영적 느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아버지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할아버지 고 양춘식 목사(인천성광교회), 아버지 고 양용주 목사(청파중앙교회, 예장 대신 증경총회장), 작은아버지 양치호 목사(인천성광교회, 예장 대신 증경총회장), 그리고 육촌형 양일호 목사(대전영광교회)와 함께 3대째 목회자 길을 가면서 “천국에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다시 볼 때까지 고 양용주 목사의 본을 받아 최선을 다하는 목회 인생을 살겠노라”고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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