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2)
[지상중계]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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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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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C헤럴드 논설위원)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지난해 8월 20~22일, 사흘간 제주시 올레기도원에서, 또한 지난 1월 21일부터 이틀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라(행 2:43~47)’는 주제로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뤄 공교회성을 회복하는데 앞장 서 나가기로 다짐했다.사진은 첫 주제 강연을 하는 정일웅 박사. 올 가을에도 목회자 콘퍼런스가 기획돼 있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C헤럴드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지난해 8월 20~22일, 사흘간 제주시 올레기도원에서, 또한 지난 1월 21일부터 이틀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라(행 2:43~47)’는 주제로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뤄 공교회성을 회복하는데 앞장 서 나가기로 다짐했다.사진은 첫 주제 강연을 하는 정일웅 박사. 올 가을에도 목회자 콘퍼런스가 기획돼 있다.

2) 코메니우스의 작품과 그의 활동역사

코메니우스는 그의 생애 동안에 많은 저술과 활동을 하게 되는데, 문서로는 약 200여 종 이상을 책으로 남겼으며, 그간 많이 분실되었지만, 아직도 150여종의 작품들이 남아 있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는 1614년 대학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프레로브(Prerov)에서 라틴어 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후에 그 학교의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교육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경험하는 중요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1616년에 코메니우스는 목사로 안수를 받고, 플렉(Fulnek)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가 된다. 1618년 결혼을 하였으며, 또한 풀넥의 교회와 그곳 학교의 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께 병행하였다. 풀넥의 교회를 맡게 된 것은, 그곳 대부분 교회의 구성원들이 독일 브란덴부르그 출신들인 왈도파 신도의 후손들로, 그들이 모두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메니우스가 그 교회의 목회사역에 적임자로 추천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풀넥의 목회사역이 불과 3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1618-1621), 그곳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으며, 그의 주요작품인 하늘로 보내는 편지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 편지들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편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내고 받는 편지 등, 4개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사회적인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글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곧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보헤미아(체코)의 정치적인 상황이 형제연합교회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가톨릭으로부터 코메니우스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벌써 1618-1620년 사이에 프라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세력과 가톨릭 편에 서 있는 황제를 중심한 반종교개혁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정권찬탈을 시도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제후세력들이 반종교개혁세력의 대항으로 결국 162011월 프라하 근교, 백산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게 되었고, 보헤미아는 다시 가톨릭의 정치세력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이 싸움은 바로 유럽사회 전체를 파괴했던 30년 종교전쟁(1618-1648)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은둔생활에서, 코메니우스는 가장 슬픈 비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흑사병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잃게 된 일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적인 슬픔을 억누르고, 그때 만든 유명한 책이,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Die Labyrinth der Welt und das Pradies des Herzens)이다.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경험했던 인간의 모습과 사회적인 삶의 형태를 비유적이며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역시 이 책은 서사시적인 형태로 작성되어 오늘날까지 체코인들이 많이 읽는 유명한 고전 작품이 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영국의 존 번연이 만든 천로역정은 코메니우스의 이 책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한다. 코메니우스는 1622-1625년에도 슬픔에 슬픔을’, ‘위로에 위로를등의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이글들은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를 위로하는 위로서가 되었다. 그리고 3번째 위로의 책은 안전함의 중심”(Centrum securitatis)이란 글인데, 이 글에서 분명히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을 삼각 구도로 하는 코메니우스의 사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 글은 세상이란 바퀴 한가운데(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묘사하였으며, 세상의 사물들은 방사선 모양으로 혹은 바퀴의 빗장 살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중심부 주변을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것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데, 즉 각각의 피조물은 두 개의 중심부를 가지게 되며, 하나는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이시며, 다른 하나는 자시 자신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자신의 독특성과 본성에 관한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중심개념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확고부동한 위치이자, 동시에 역동적인 관계성을 뜻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내적인 하나님과 외적으로는 회전하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적인 사명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일이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인 사명을 놓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실수로서,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미로에 등장하는 호기심처럼, 피조물에 몰두하는 일 때문으로 판단하였다. 피조물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며,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부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마침내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모든 악의 시초가 되는 것으로 코메니우스는 인식하였다.

코메니우스의 글들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을 통하여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것은 코메니우스에게서 성경은 끊임없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제공하는 위로의 샘이었고, 지치지 않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신의 고난을 보며, 그 자체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염려하며, 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자요, 부활하신 자일 뿐 아니라, 역시 형제연합교회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유일한 왕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분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앙의 확신이 코메니우스가 인생의 어려운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그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세에서 풍성한 결실을 이루게 된 것들을 다 빼앗기고 잃어버리게 될 때에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팔에 붙들린 자신을 확신하고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은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이 모든 글에서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1627년 보헤미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갱신된 국가법이란 것을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의 모든 신분 계층들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톨릭의 합스부르그 가문이 모든 권세를 쥐게 되었고, 보헤미아는 완전히 가톨릭의 세상이 되었다. 결국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더이상 조국 보헤미아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이웃 도시인 폴란드 리사(Lissa)에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곳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의 젊은 목회자인 코메니우스가 사전에 그 망명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와 함께 리사(Lissa)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먼저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1628-1641년까지 13년을 보내면서 많은 책들을 쓰게 되었고, 또한 그가 여기서 보헤미아를 넘어서 유럽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되는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1648-1650, 1654-1656년에도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와서 마치나 제2의 고향처럼 거주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곳 리사의 인문 고등학교 교사로, 후에 학교운영의 책임자인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32년에 형제연합교회의 교단 총회의 서기직의 일을 겸하여 맡게 되었다. 분주한 일과에서도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쓰게 되었는데, 먼저 교육의 목적, 목표, 아이들에 대한 이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인지? 교수방법을 제시한 교사지침서인 보헤미아의 교수학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교수학(Didactica magna)’이란 이름으로 다시 수정 보완하여, 그의 교육학 총서 첫 번 내용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까지 가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 것인지? 부모들에게 주는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지침서로서 어머니 학교의 소식’(Informatorium der Mutterschul)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언어 학습을 위한 교재로 열려진 언어의 문자연과학 개론등을 출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 당시 자연과학자의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고 본다. 이 책들은 모두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1637년에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책을 만들게 되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그 동안 생각해 온 교육철학의 핵심주제인 모든 지혜’(Pan- sophia)로 모든 사람을 철저하게 교육하려는 범지혜의 교육철학을 제시한 책이었다. 라틴어로 작성된 이 책이 하르트맆(Hartlib)이란 그의 친구에 의하여 1638년 영국에서 출판되면서 코메니우스는 일약 범지혜의 철학자로, 그리고 교육학자로 유럽의 지성인 세계에 그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1640년대의 코메니우스는 이 책으로 인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교육학의 명사로 초청을 받게 된다. 먼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가톨릭의 추기경 리헤리우(Richelieu)가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의 대학을 세우려 하였고, 영국에서도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의 대학과 영국의 국가교육계획을 개혁하는 업무를 그에게 맡기려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코메니우스는 학교교육에 필요한 교재 집필로 초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그 당시 미국 마세추세츠주에 하바드대학이 설립되면서, 코메니우스를 초대총장으로 초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코메니우스는 이 모든 초청들에 다 응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책임지고 있는 형제연합교회를 돌보아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다만 영국의회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곧 영국 내의 종교대립으로 인한 시민혁명이 일어나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9개월 동안 런던에 체류하다가 다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영국의 체류 동안에 코메니우스는 빛의 길’(Via Lucis)이란 그의 범지혜의 교육철학에 근거한 학교교육개혁에 연관된 문화 정치적인 책을 집필하였고,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수정 보완하여 1668년에 그 책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1620년대의 영국의 퓨리턴의 지도자였던 레비스 베일리스(Levis Balylys)경건의 실제’(Praxis Pietatis)란 책을 형제연합교회 형제들의 경건을 돕기 위하여 체코어로 번역의 해설서를 출판하였으며, 또한 런던에 기거하면서 퓨리턴들의 배후에서 경건운동을 독려하고 지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를 영국으로 초청했던 배후의 인물은 그의 하르트맆 이었는데, 그 역시 퓨리턴의 지도적인 형제들과 교제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퓨리턴들이 주도하는 영국의 국가교육계획수립의 과제가 코메니우스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16426월 영국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도중에 암스테르담에 들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스웨덴의 초청을 받도록 힘썼던 데 기어(Louis de Geer)를 만났으며, 또한 라이덴 근처, 엔데게스트 성(endegeest)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R.Descartes)도 만나게 된다. 물론 두 인물의 만남은 각각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사전에 준비했던 일이며, 오래 살았던 코메니우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데까르트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서로의 학문적인 경의를 표하였고, 데까르트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의 철학과 세계 공용어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였으며,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수학적인 사고방식과 엄격한 검증에 감탄하였으며,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생각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의 차이점은 이성 중심의 인식에 관한 것인데, 데까르트가 그의 모든 사상체계를 오직 이성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지식습득에는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과 하나님 계시의 증거가 필요함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후에 여러 글들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잘 분석해 내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명제를 비판하게 되는데, 생각할 때만 존재하고 잠잘 때는 존재하지 않는지를 반문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면서도, 행동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였으며, 데까르트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의 이원적인 분리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Cartesianer)의 데까르트에 관한 사상의 왜곡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말년에 암스테르담에 산재해 있는 데까르트주의(Caetesianismus)적인 사고를 철학의 암적인 훼손‘(Der Krebsschaden der Philosophie)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때 16428, 50세의 나이에 역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스웨덴의 수상 옥센스티에르나(A.Oxenstierna)를 만나고, 루이스 데기어(R.de Geer)의 재정후원으로 스웨덴의 학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재 집필을 위임받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이 작업을 스웨덴의 영토였던 독일의 동북해안에 있는 도시 엘빙(Elbing)에 거하면서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곳이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리사(Lissa)와 거리상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제연합교회를 돌보는 일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스웨덴의 학교교재 집필 외에도, 그가 후에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세계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서(CC)를 준비하였다.

164856세가 된 코메니우스는 리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도로테아(Dorothea)가 병으로 죽게 된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 종교전쟁은 마지막 국면에 이르게 된다. 가톨릭 편인 프랑스와 프로테스탄트 편인 스웨덴 사이의 전쟁은 뮌스터 오스나부릭에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Westfallia Friede, 1648)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형제연합교회의 종교자유는 거기서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고향이며 조국인 보헤미아는 적그리스도인 가톨릭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역시 형제연합교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1650년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에 드리는 위로의 글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교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유산인 6가지를 보존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진리의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표현해 놓았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직이 되었다. 그리고 164957세 나이에 요한나 가요소바(J.Gajusova)와 함께 세 번째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하도록 코메니우스는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항가리(Ungarn)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로 개혁하는 일을 해달라는 초청으로 그곳으로 먼저 가게 된다(1650).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곳에서 학교교육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유명한 두 권의 교재인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Orbis sensualium pictus)와 놀이학교(Schola Ludus)란 책을 출판하게 된다.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으로 언어와 세계의 자연 피조물과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한 모든 지혜학습의 모범적인 책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학교를 아이들의 놀이의 장, 즐거움의 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연극 상연 등을 하도록 대본을 제시한 책이기도 하였다.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1658년에 준비하여 라틴어-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역시 항가리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를 지지하던 영주 라콕지(Racockzy)가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사로스파탁의 사람들에게서 코메니우스가 원했던 범지혜의 교육에 관한 관심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사에서의 형제연합교회는 코메니우스가 다시 리사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3번째 다시 리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 역시 코메니우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스웨덴이 폴란드에서의 전쟁으로 코메니우스가 제2의 고향처럼 머물렀던 리싸가 가톨릭 군대의 침입으로 정령 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집과 모든 서재가 불타게 되었고, 그가 그동안 작성하고 준비했던 원고들의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황급히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피난처를 또 찾아야만 했었다.

원래 코메니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코메니우스 인생의 마지막 기간이 암스테르담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이전에 큰 도움을 받았던 화란의 거부, 루이스 더기어(Louis 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코메니우스는 14년을 살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옆에는 그의 사위 피터스 피굴루스 야불론스키(P.P.Jablonsky)가 동행하였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큰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하나는 교수학총서’(Opera didactica omnia)를 출판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시도했던 인간사물의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의 글을 완성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물론 총 7권으로 구성된 라틴어 원고였지만, 그 가운데서 1-2권은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모든 교육과 관련된 문서들을 총 집결시킨 교육학총서는 암스테르담 시 정부의 재정후원으로 출판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코메니우스의 곁에는 예언하는 자들이 항상 동행하였는데, 크리스토퍼 코터, 크리스티나 포니아톱스카, 니콜라우스 드라빅 등의 인물들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때때로 그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 일찍이 형제연합교회에 고소당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며, “계시의 역사란 글과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이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드라빅의 예언인데, 그는 30년 종교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고,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적중되지 않았으며,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심지어 코메니우스의 옛 제자였던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니콜라우스 아르놀드(N.Arnold,1618-1681)의 코메니우스의 신학을 비판하였는데, 코메니우스는 큰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예언과 관련된 여러 비판에 관하여 그냥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침내 1665년에 어두움에서의 빛”(Lux a tenebris)이란 책을 출판하여, 긴급한 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이 형제연합교회의 미래를 밝히는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드라빅(Drabik)의 소리에 경청했던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 외에 어떠한 구원의 계시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의 노년기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지속하였는데, 형제연합교회의 찬송가와 신앙교육을 위한 요리문답서,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에 관한 글, 교회법의 개정과 형제연합교회의 옛 신앙고백서의 개정판 등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직접 연관된 3편의 글, ‘삼단논법’(Syllogismus), ‘독일을 향한 마지막 나팔’(Die letzte Posaun ueber Deutschland), 그리고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등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평화의 천사1664-1667년 사이에 있었던 계속된 영국과 네델란드 사이에 해전을 종식 시키려고 브레다(Breda)에 모였던 양국의 사절단들 앞에서 코메니우스가 화란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연설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바다의 항해권으로 다투고 서로 주도권을 주장하는 그들에게 바닷길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인이며, 그 바닷길은 평화롭게 함께 사용해야 할 공동의 재산이지, 어느 개인이나, 한 나라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해상권 다툼은 중단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코메니우스의 연설에 감동을 받는 대표단들은 해상권 다툼의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여, 코메니우스는 그 일에 그게 공헌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평화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평화교육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거의 인생의 마지막에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거부하고, 단일신론을 강하게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소시니안주의에 대항하여 많은 비판의 글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노년의 코메니우스에게 가장 마음 아픈 일 중 하나는 역시 그가 죽기 전해, 흐로닝겐 대학의 칼빈주의자 마레시우스(S.Maresius,1599-1673)에게서 코메니우스의 종말론적인 사상이 비판된 일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코메니우스는 건강악화로 미레시우스의 비판에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코메니우스 학문의 연구가들은 마레시우스의 비판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있다. 코메니우스의 종말론적인 사상의 논쟁점은 초월적인 낙원과 내재적인 낙원 이해 사이의 관계로 본다. 그리고 이것은 동방교부(이레네우스)의 종말론신학과 서방교부(어그스틴)의 종말론신학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체로 17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어그스틴의 신학에 따라 루터나 칼빈의 생각처럼 장차 이루어질 약속된 영원한 나라는 이 땅에 존재할 내재적인 낙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된 초월적인 낙원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그리스도의 통치)을 기대했으며, 그 나라는 인간이 개인의 경건의 거룩성의 도를 쌓으며,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인간의 준비와 적극적인 활동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회복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였고, 교육의 개혁과 정치의 개혁과 교회의 개혁이 필요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능동적인 내재적인 낙원에 관한 이해에 따른 인간적인 책임의 강조 때문에 마레시우스는 코메니우스야 말로 영원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인협동설(Synergismus)을 가르치는 자라고 비판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할 영원한 세계를 인간이 만들려고 하는 종말의 환상주의, 또는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분명히 세상(하나님의 창조세계)을 보존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신인협동설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신적인 협력’(Concurus divinus)을 더 깊이 이해한 것이었다. 신적인 도움을 위하여 인간은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레시우스가 코메니우스를 신인협동설 주장자로 비판한 것은 신인협동과 신적인 협력의 관계를 더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마레시우스의 오해로 판명되었다.

 

코메니우스는 마지막 작품으로 꼭 필요한 한 가지”(Unum necessarium, 1667-1668)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의 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희망을 다시 한번 감동적으로, 친밀하게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먼저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행복은 첫째, 이성의 밝은 빛 가운데서, 둘째, 일 더미 속에서 일할 때, 그 일들이 적절한 순서에 따라 진행될 때이며, 셋째, 이생의 소유를 확실히 누리는 것에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이 왜 그렇게 잘 실현되지 않는지에 대하여 미로란 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의 미로에서 나올 수 있는 탈출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혼란은 오직 한 가지, 즉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음을 전제하고, 필요한 것을 간과하고, 불필요한 것에 끊임없이 몰두하며, 그것에 뒤엉켜 휩쓸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규칙(말씀)만이 오직 세상의 미로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출구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을 알며, 자신을 다스리며, 자신을 사용하고,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것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 3가지 영역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그가 말한 교육을 포함한 학문, 정치, 종교의 개혁이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그의 형제연합교회의 사역은 교회연합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사역은 이러한 일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분명히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이끌던 작은 형제연합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민족 가운데, 곳곳에서 세워지기를 소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관계하던 작은 형제연합교회는 문을 닫고, 두 가지 책 출판과 함께 전 세계를 향하여 큰 형제연합교회의 문을 열어젖히기를 희망하였다. 하나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모국어로 쓴 책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민족들을 빨리 계몽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사의 관계개선에 관한 보편적인 제언이란 세계개혁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총 7권으로 구성된 그의 책을 부분적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기고, 1670111578세의 나이로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그는 암스데르담의 근교 나르덴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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