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1)
[지상중계]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1)
  • 양진우 기자
  • 승인 2019.06.24 2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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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매년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목회자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주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매년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목회자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주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한국교회와 신학계는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와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에 관해서는 그렇지 잘 알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유럽의 교회와 신학계가 이들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당대(17세기)에 교육학자로 이름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교육의 역사에서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가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유럽교회의 역사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메니우스는 17세기의 교육학자일 뿐 아니라, 신학자요, 철학자였다는 사실들이 최근의 코메니우스에 관한 연구(체코/독일)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새롭게 평가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신적인 계시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교육을 필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여, 전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되돌리는 전인교육과 평생교육계획(Curriculum)을 제시했던 인물이며, 그것이 모든 지혜의 배움인 범지혜론(Pansophia)과 모두를 위한 교육론인 범교육론(Pampaedia)이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교육과 실천신학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학문의 영역이 분명하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에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후예들로서, 그의 교회개혁 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았던 유럽 최초의 개혁교회이기도 하였다.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 교회에 속한 인물로 정확히 말하면, 형제연합교회가 탄생 한지, 160년이 지난 후, 17세기에 출생하여 형제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 후에 3번째 그 교회의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기도 하였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때문에 인간적으로 갖은 고난과 핍박과 신앙의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마침내 조국 보헤미아에서 쫓겨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망명 생활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30년 종교전쟁 이후에 형제연합교회는 종교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해산되어야 했으며, 코메니우스는 감독직을 스스로 내려놓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러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코메니우스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위하여 전 인류의 구원과 교육과 참된 경건과 평화로운 삶의 성취를 위해 학문연구를 지속한 인물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과 교회의 정황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국교회에 소개해 보려고 이 글을 준비하였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과 신앙역사 이야기를 통하여, 그간 우리 모두 잊고 있었던 인물과 교회와 사귀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이글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도전과 배움이 있기를 소원한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5개의 작은 주제들로 구성하여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과 신앙역사 이야기를 전개하게 될 것이다. 첫째, 17세기, 시대의 전환기와 코메니우스란 주제로 그의 생애와 활동과 역할 등을 먼저 소개하며, 특히 20세기 후반, 유럽 신학자들이 코메니우스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다양한 학자들의 평가들이 소개된다. 둘째, 이상적인 교회공동체를 지향했던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와 그들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특성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가 지향했던 신학과 코메니우스의 신학은 특히 성경이해와 구원의 신학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소개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루터보다 종교개혁을 먼저 부르짖게 된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의 역사를 시작하여, 후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가장 잘 추종했던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와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로마가톨릭의 반종교개혁과 대립한 역사인 30년 종교전쟁(1618-1648)의 역사가 소개될 것이다. 셋째,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성경 계시와 구원론을 비롯하여 죄 고백과 관련된 그들 신앙적인 실제를 유추. 해석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목회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인의 죄를 고백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밝히는 시금석이 제시될 것으로 판단한다. 넷째,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보여준, 그리고 견지해 온 교회의 연합정신에 관한 것이다. 분열과 분열, 경쟁과 경쟁을 거듭해 온 분열된 한국교회의 실상에 분명한 도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섯째,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결론 분분에서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과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적인 학문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필자 나름대로 해석하여 밝혀보게 될 것이다. 비록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가능한 역사적인 근거에 의존하여 해석하는 것이기에 필자의 의도를 깊이 헤아리는 전제에서 독서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지난해 8월 20~22일, 사흘간 제주시 올레기도원에서, 또한 지난 1월 21일부터 이틀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라(행 2:43~47)’는 주제로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뤄 공교회성을 회복하는데 앞장 서 나가기로 다짐했다.사진은 첫 주제 강연을 하는 정일웅 박사.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이사장 송용걸 목사, 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본지 논설위원)은 지난해 8월 20~22일, 사흘간 제주시 올레기도원에서, 또한 지난 1월 21일부터 이틀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라(행 2:43~47)’는 주제로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뤄 공교회성을 회복하는데 앞장 서 나가기로 다짐했다.사진은 첫 주제 강연을 하는 정일웅 박사.

1. 17세기, 유럽의 시대 전환기와 코메니우스

17세기, 유럽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큰 변화를 겪는 때였다. 옛 질서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혁에는 무차별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파괴적인 싸움이 동반되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는 반종교개혁의 가톨릭 세력이었다. 이러한 대립이 바로 30년간 지속된 종교전쟁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일생을 거의 분열과 대립, 폭력을 경험했던 이 전쟁과 함께, 17세기 유럽의 한복판에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면서 망명 생활 가운데서 지냈다.

이러한 시대의 특징들은 세계관의 불확실성, 인식론의 불확실성, 종교적인 불확실성이 극단에 이르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실로 17세기는 모든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되고 가치혼돈의 위협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에 다시 질문이 던져지면서 새로운 가치체계(질서)를 요구하는 시기가 분명하였다.

이러한 시대변화의 요구를 직시하면서, 코메니우스는 어떻게 여전히 성경의 진리가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무너진 유럽 사회를 새롭게 기독교사회로 회복해가야 할지를 숙고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세력의 종교박해로 인하여 수탄 핍박과 고난을 겪는 형제연합교회를 이끌고,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에 처하여지면서도, 형제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역사로 신앙의 자유를 누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30년 종교전쟁을 종결하는 붸스트팔리아 평화조약마저도,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에는 그 어떤 희망을 안겨주지 않았다. 이제 그는 형제연합교회를 해산해야 했으며, 자신의 감독직도 내려 놓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코메니우스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먼저 인간을 바로 세우는 개선의 교육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으며, 나아가 전 문화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꽃피는 날을 희망하며, 새로운 교회의 경건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을 통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온전한 사회개혁과 삶의 개혁을 유럽의 지성인들과 정치인들과 교회지도자들을 향하여 외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코메니우스란 역사적인 인물과 그의 활동과 그가 남긴 학문의 대 작품들에 대하여 알아가면서 현대 유럽학자들이 코메니우스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다루어보기로 한다.

 

1) 코메니우스의 출생과 성장과정의 역사

코메니우스는 1592, 보헤미아(Bohemia,체코공화국)의 남쪽, 모라비아(Moravia)의 우헤르스키브로드(Uhersky-Brod)근교 니브니체(Nivnic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10-11), 고아가 된 코메니우스를 그의 고모가 슬로바키아(Slova- kia)국경 근처에 있는 스트라츠니체(Straznice)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다. 그 때문에 그는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농사일과 수공업을 배우면서 자랐다. 16세에 이르러서야 그의 아버지가 남긴 얼마의 유산이 발견되면서, 그 덕택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고향 근처의 작은 도시 프레로브(Prerov)에 있는 형제연합교회가 운영하는 라틴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의 총명한 머리는 숨길 수가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형제연합교회가 그를 주목하고, 장차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독일에 있는 헤어보른(Herborn)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름은 원래 체코어로 코멘스키(Komensky’)였으나, 그것은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콤나(Komna)에서 온 자란 뜻을 가진데 근거하고 있으며, 청년기의 대학 생활에서 선지자 아모스(Amos)를 알고 좋아하였고, 그의 이름, (Jan) 뒤에다 붙였으며, 코멘스키를 라틴어로 표기하여 코메니우스(Comenius)로 불렀다.

코메니우스는 그곳 대학들에서 훌륭한 선생들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먼저 독일의 헤어보른(Herborn)대학에서는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H.Alsted)교수로, 그에게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백과사전의 작업, 그의 철학적인 사고인 범지혜(Pan- sophia)사상에 관하여 큰 도움을 입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요하네스 피셔(J.Fischer)교수에게서는 성경과 성경해석의 중요성에 관한 것으로,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천년왕국 사상과 기독교의 종말 사상에 관하여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대학에서는 다빗 파레우스(David Pareus)교수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분쟁을 극복하고 서로 화해와 연합을 힘쓰는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코메니우스는 그에게서 평화 사상과 교회 연합사상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독일에서 교수학(Didactic)의 전문가로 불리는 볼프강 라트케(W.Ratke)교수의 교수학적인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되었는데, 후에 그의 대교수학’ (Didactica magna)란 책에서 교수 학문적인 사상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게기가 돠었다.

코메니우스는 대학 시절의 학업 결과는 놀라운 정도였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에 정통하였으며,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관하여도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도 정통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그 당시 유럽에서 이름나 있던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비베스(J.L.Vives)와 신학, 철학, 자연과학 등도 수용하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과 토마소 캄파넬라(T.Campanella)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Descartes)를 만나 교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코메니우스 사상이해의 중요한 근거들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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